먼저 내 위치부터 밝혀 두고 싶다. 나는 아직 게임 한 편을 완성해 공개한 개발자가 아니다. 조금 자조적으로 말하면, 요즘 ‘AI slop’이라고 낮춰 부르는 결과물조차 내놓지 못했다. 게임을 만들고 싶지만 끝까지 만들어 본 적은 없는 개발자 지망생이고, 무엇보다 게임을 오래 해 온 플레이어다.
그래서 이 글은 성공한 개발자가 전하는 제작 비법이 아니다. 게임을 하는 동안에는 무엇이 재미있고 아쉬운지 곧잘 말하면서도, 막상 직접 만들려니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다. 이 글은 그런 내가 조사하며 찾은 잠정적인 기준에 가깝다.
나도 easy to learn, hard to master라는 말을 익숙하게 들어 왔다. 처음 배우기는 쉽지만 오래 파고들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뜻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문제는 이 문장이 실제 설계 방법을 알려 주지는 않는다는 데 있다. 규칙을 줄이면 배우기 쉬워질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오래 고민할 게임이 되지는 않는다. 선택지와 계산을 늘린다고 깊어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 붙잡은 출발점은 이렇다. 처음에는 한 번의 결정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익숙해진 뒤에는 같은 행동도 상황에 따라 가치가 달라져야 한다. 이 글은 이 조건을 작은 첫 구현에서 확인해 보려는 기록이다.
구호를 설계 질문으로 바꾼다
easy to learn, hard to master를 그대로 목표에 적으면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 구호를 다음 질문으로 바꿔 보기로 했다.
- 처음 하는 사람도 설명에만 매달리지 않고 첫 번째 중요한 행동을 해 볼 수 있는가.
- 행동한 뒤 무엇이 달라졌는지,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는가.
- 같은 행동이 상황에 따라 다른 결과와 판단을 요구하는가.
- 여러 번 할수록 외울 항목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를 발견하는가.
- 깊이 파고들지 않는 사람도 게임이 주려는 핵심 경험을 끝까지 누릴 수 있는가.
여기서 hard to master는 불친절하거나 무조건 어려워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정보를 숨기고 계산을 복잡하게 만들면 처음부터 어려운 게임은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결과를 이해하지 못해 헤매는 시간과 규칙을 이해한 뒤 더 나은 판단을 찾는 시간은 다르다.
모든 게임이 높은 숙련의 깊이를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야기나 그림을 편하게 즐기거나 짧은 시간 안에 한 감정을 전하는 일도 그 자체로 충분한 목표다. Xbox 접근성 지침은 난이도를 플레이어의 능력과 게임이 놓은 장벽 사이에서 생기는 주관적 경험으로 설명한다. 이야기나 미술을 즐기려는 사람을 막지 않는 선택지도 권한다. 재미를 보장하는 공식은 아니지만, ‘어려울수록 깊다’고 단순하게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된다. Xbox Accessibility Guideline 108
먼저 어떤 깊이를 만들지 고른다
‘깊은 게임’이라는 말은 서로 다른 경험을 한데 묶는다. 여기서는 다음 여섯 가지를 정답이 아니라 설계를 나눠 보는 기준으로 삼는다. MDA도 게임 경험을 도전 하나로 환원하지 않고 감각, 이야기, 발견, 표현, 관계 등 여러 목표로 나눈다. 다만 이 역시 설계를 이야기하기 위한 틀이지 재미의 원인을 증명한 공식은 아니다. MDA: A Formal Approach to Game Design and Game Research
- 정보와 선택의 조합에서 나오는 전략적 깊이
- 사건과 인물의 의미가 쌓이는 서사적 깊이
- 그림, 소리, 움직임과 공간이 만드는 감각적 깊이
- 입력과 타이밍을 익히며 생기는 숙련의 깊이
- 다른 사람과 역할·규범을 만들며 생기는 사회적 깊이
- 수작업 콘텐츠와 긴 호흡에서 생기는 누적의 깊이
한 게임이 여러 축을 가질 수는 있다. 다만 아직 한 편도 완성하지 못한 내 입장에서는 처음부터 모두 크게 만들겠다는 계획이 아무것도 시험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전략적 깊이를 만들고 싶다면 상태와 선택을 비교할 수 있어야 한다. 감각적 깊이를 만들고 싶다면 실제 조작과 연출을 느껴 봐야 한다. 서사적 깊이는 한 장면보다 앞뒤 맥락을 봐야 한다.
이 글은 그중 전략·퍼즐·시스템 게임의 결정 구조에 초점을 둔다. 다른 축이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첫 구현에서 무엇을 확인할지 분명히 하기 위해서다.
첫 결정은 읽히고, 다음 결정은 달라져야 한다
한 번의 결정을 다섯 칸으로 쓰면 막연한 구호가 조금 구체적으로 보인다. 어느 연구에서 그대로 가져온 표준은 아니다. 상태와 행위를 나눠 본 게임 규칙 연구와 계속 배울 여지를 강조한 전략적 깊이 연구를, 실제로 써 볼 수 있게 묶은 것이다. Defining Game Mechanics, Depth in Strategic Games
| 칸 | 적을 내용 |
|---|---|
| 정보 | 선택 전에 플레이어가 알 수 있는 것 |
| 행동 | 지금 고를 수 있는 것 |
| 상태 변화 | 선택 뒤 실제로 달라지는 것 |
| 피드백 | 달라졌음을 느끼게 하는 것 |
| 새 정보 | 다음 선택의 근거가 되는 것 |
합성 예시로 세 구역만 있는 짧은 탐색 게임을 생각해 보자. 플레이어는 매 차례 정찰, 이동, 휴식 가운데 하나를 고른다. 정찰하면 다음 구역의 위험을 일부 알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른다. 이동하면 목표에 가까워지지만 에너지를 쓰고, 휴식하면 에너지를 되찾는 대신 주변의 위험이 커진다.
처음 하는 사람은 정찰하면 정보를 얻고, 이동하면 에너지를 쓰며, 휴식하면 위험이 커진다는 관계부터 배운다. 이 원인과 결과가 읽히는 것이 ‘배우기 쉬움’의 시작이다. 익숙해진 사람은 남은 시간과 에너지, 드러난 위험을 함께 보고 같은 세 행동의 가치를 다르게 판단한다. 행동은 그대로 세 개지만 살펴야 할 관계가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세 개라는 사실이 아니다. 정찰로 얻은 정보가 이동과 휴식의 가치를 바꾸고, 이동 결과와 남은 에너지가 다음 정찰의 필요성을 바꾸는가가 중요하다. 소리와 움직임, 숫자 변화도 그 판단을 돕는 피드백이어야 한다.
규칙 수보다 선택의 차이를 본다
규칙이 많아도 늘 같은 선택이 이긴다면 깊이는 쉽게 사라진다. 경우의 수가 많다는 사실과 오래 배울 것이 있다는 사실도 같지 않다. 전략적 깊이를 형식화한 연구 역시 깊이를 단순한 상태 공간의 크기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부분 해법을 고쳐 갈 여지가 있는 속성으로 탐색한다. 이 제안이 모든 장르와 플레이어가 느끼는 깊이를 재는 완성된 척도는 아니다. Depth in Strategic Games
내가 선택지를 볼 때 먼저 묻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다.
- 어떤 상황에서 이 선택이 유리한가.
- 선택 전에 그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가.
- 잘못 골랐을 때 바꾸거나 물러날 수 있는가.
- 실패 비용은 어느 정도인가.
- 다른 선택이 필요해지는 예외가 실제로 나오는가.
위험의 징후가 없고, 마주친 뒤에는 바꿀 수도 없으며, 실패에서 배울 정보도 없다면 놀라움은 남아도 결정은 남지 않는다. 모든 것을 미리 보여 줄 필요는 없지만, 나중에 돌아봤을 때 “내가 알아차리거나 대응할 길이 있었다”고 느낄 단서는 필요하다.
깊이를 만든다는 이유로 시스템마다 복잡성을 더할 필요도 없다. 한 축에서 이미 많은 상성과 예외를 배워야 한다면 성장이나 장비는 단순하게 둘 수 있다. 깊이는 모든 곳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어디에서 생각하게 할지 고르는 일에 가깝다.
첫 구현은 질문 하나에 답하는 조각이다
타이틀, 상점, 설정, 도감, 결과 화면을 차례로 만들면 진행한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런 화면이 핵심 경험까지 확인해 주지는 않는다. 지금 내게 필요한 첫 구현은 완성품처럼 보이는 장면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결정이 한 번 돌아가는 작은 조각이다.
시제품을 완성품의 축소판으로 생각하면 부담이 커진다. Houde와 Hill은 시제품이 역할, 모양과 감각, 구현 가운데 무엇을 알아보려는지 먼저 정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게임 개발자 Rami Ismail은 아이디어의 위험을 보는 시제품과 제작 과정을 보는 수직 슬라이스를 구분한다. 유용한 실무 관점이지만 업계 전체에서 검증된 단일 표준은 아니다. What Do Prototypes Prototype?, Prototypes & Vertical Slice
| 구분 | 적을 내용 |
|---|---|
| 실제 상호작용 | 이번에 반드시 동작해야 하는 결정 고리 |
| 임시 시스템 | 고정값, 임시 그림, 짧은 데이터로 대신할 부분 |
| 모르는 위험 | 이 조각을 실행해야만 알 수 있는 문제 |
| 포기 기준 | 어떤 결과라면 구조를 바꾸거나 아이디어를 접을지 |
앞의 탐색 게임이라면 정찰·이동·휴식과 위험 변화는 실제로 만든다. 상점, 장기 성장, 여러 지역은 임시로 둔다. 다른 사람에게 자세히 설명하지 않고 해 보게 한 뒤, 첫 선택을 할 수 있는지와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몇 번 해 본 뒤 판단 기준이 달라지는지도 본다. 휴식이 늘 정답이거나 정찰의 결과가 다음 행동을 바꾸지 못한다면 콘텐츠를 늘리기 전에 고리를 고친다.
물론 이 작은 조각이 게임 전체를 대신하지는 않는다. 긴 이야기의 누적 효과나 대량 콘텐츠의 생산 부담은 짧은 시제품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 한 번의 결정을 더 만들어 볼 가치가 있는가” 정도다. 완성 경험이 없는 내가 성공 공식을 주장하기보다, 더 만들어 볼 이유부터 찾는 방법이다.
무작위는 새 판단을 만들 수도, 판단을 대신할 수도 있다
무작위 상황이 매번 다른 정보를 주고, 플레이어가 그 차이를 읽어 행동을 바꾼다면 결정 고리는 넓어진다. 반대로 결과가 거의 보이지 않는 확률에 달려 있고 대응할 방법도 없다면, 무작위는 판단을 만들기보다 판단을 대신한다.
내가 확인하고 싶은 것도 확률이 있느냐가 아니다. 결과가 달라졌을 때 새롭게 고민할 선택이 남는가, 다음에는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는가이다. 문제를 재현할 필요가 있다면 시드와 주요 선택 정도를 기록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상황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은 재미나 공정성을 증명하지 않는다. 기록은 그저 같은 문제를 다시 보는 손잡이다.
가챠와 양산형 게임을 비관적으로 보는 이유
여기부터는 연구의 결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한 플레이어의 주관이다. 나는 가챠가 들어간 게임을 보면 먼저 비관적으로 바라본다. 비슷한 구조를 되풀이하면서 캐릭터와 수치만 바꾸고, 그 위에 뽑기를 얹은 게임은 내 눈에 흔히 말하는 ‘AI slop’보다도 더 양산형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대중의 평가와 많은 플레이어의 취향은 내 생각과 다를 수 있다.
그렇다고 AI를 사용한 게임은 모두 조잡하다거나, 가챠가 들어간 게임은 모두 얕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 AI slop은 측정 가능한 품질 등급이 아니다. Steam도 AI 사용 여부를 공개하도록 요구하면서, 사전 생성 AI 결과물은 비AI 콘텐츠와 같은 기준으로 검토한다고 설명한다. 유통 정책일 뿐 품질 연구는 아니지만, 제작 도구와 결과물의 수준을 나눠 봐야 한다는 사례는 된다. Steamworks Content Survey
가챠도 복잡한 전투와 팀 구성, 이야기에 함께 들어갈 수 있다. 내가 깊이를 느끼기 어려워지는 순간은 따로 있다. 시스템을 얼마나 이해했는지보다 특정 캐릭터나 장비를 가졌는지가 답을 크게 좌우할 때다. 플레이 중 판단보다 획득과 육성 수치가 문제를 대신 풀거나, 새 콘텐츠가 늘어도 내가 하는 선택은 그대로 반복될 때도 마찬가지다.
내가 경계하는 것은 가챠라는 이름 하나가 아니다. 플레이어의 판단보다 보유 여부와 반복 보상이 앞서면서 빈약한 결정 구조를 가리는 결합이다. 그래서 내 게임을 구상할 때는 다음처럼 묻고 싶다.
- 보상을 얻은 뒤 새롭게 고민할 선택이 생기는가.
- 원하는 대상을 갖지 못해도 핵심 규칙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가.
- 숫자가 커지는 것과 플레이어의 판단이 나아지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가.
내가 실제로 이 기준을 지키며 완성할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다만 무엇을 싫어하는지에서 멈추지 않고, 그 불편함을 내가 만들 게임의 확인 질문으로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순서와 표현도 함께 본다
좋은 규칙도 한꺼번에 보여 주면 읽히지 않는다. 첫 장면에서는 기본 행동 하나를 익히게 하고, 다음 장면에서 그 행동의 비용을 보여 주고, 그 뒤에 예외나 조합을 더할 수 있다. 새로운 규칙은 이전에 배운 판단을 다시 쓰게 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게임에 긴 튜토리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세 웹 게임에서 4만 5천 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가장 복잡한 게임에서만 튜토리얼이 플레이 시간을 늘렸고, 단순한 두 게임에서는 뚜렷한 개선이 없었다. 오래된 특정 게임과 지표에 한정된 결과지만, 처음 배우는 과정도 대상과 복잡도에 맞춰 시험해야 한다는 경고로는 쓸 수 있다. The Impact of Tutorials on Games of Varying Complexity
그림과 소리, 이야기도 규칙의 장식이 아니다. 적의 움직임, 짧은 정지, 음색의 변화, 화면의 흔들림, 인물의 반응은 위험과 결과를 알려 준다. 이야기와 미술이 주된 가치인 게임도 있다. 내가 결정 고리를 먼저 보자는 것은 그것만이 게임의 가치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번에 시험하려는 깊이가 전략과 퍼즐 쪽이기 때문이다.
첫 빌드에서 내가 확인할 것
지금 단계에서 내가 만들 첫 조각에는 다음 질문이면 충분할 것 같다.
이 게임이 주려는 느낌은 무엇인가?
처음 하는 사람도 첫 번째 중요한 행동을 해 볼 수 있는가?
플레이어가 지금 아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고를 수 있는가?
선택 때문에 어떤 상태가 바뀌는가?
그 변화를 어떻게 느끼는가?
그 결과가 다음 선택을 어떻게 바꾸는가?
익숙해진 뒤에는 같은 행동의 가치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가?
문제가 생긴 판을 다시 볼 최소한의 기록이 있는가?
어떤 결과라면 이 구조를 바꾸거나 접을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고 실패작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직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는 뜻에 더 가깝다. 한 번의 결정이 읽히고 반복할수록 다른 판단이 생긴다면, 콘텐츠를 하나 더 만들 이유도 선명해진다. 새로운 적은 다른 정보를 읽게 해야 하고, 새 장비는 다른 선택을 가능하게 해야 하며, 새 지역은 익숙한 규칙을 새로운 압력 아래 놓아야 한다.
나는 아직 이 기준으로 완성작을 증명한 사람이 아니다. 다음에 만들 작은 조각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버릴지 정하려고 이 글을 썼다. easy to learn, hard to master를 좋은 말로만 남겨 두지 않는 것. 첫 결정은 읽히게 하고, 다음 결정은 달라지게 만드는 것. 지금의 나에게는 그 정도가 가장 구체적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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